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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 초밥이 오른쪽으로 도는 이유

by ฅʕ•̫͡•ʔฅ+'‚©·•⁍ 2023. 2. 2.

초밥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자면 초밥의 원형이 되는 것은 동남아시아의 민물 생선 저장방법으로 소금에 절인 민물생선을 밥 속에 넣어 발효시키는 문화였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동물성 단백질을 저장하기 위한 지혜였습니다. 지금도 일본 일부 지방에는 내장을 제거한 붕어를 소금에 절인 뒤 밥을 재워 1~2년 동안 발효시킨 후나즈시라는 음식이 있습니다. 원래는 발효용으로 만 썼던 밥은 버리고 생선만 먹던 음식이 일본에서 변화를 거치며 밥까지 같이 먹는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최전 초밥 사진
회전 초밥

 

오랫동안 일본의 초밥은 네모난 나무틀에 생선살이나 채소 등을 밥 위에 얹어서 눌러만 든 간사이 지방의 누름초밥 형태였습니다. 이후 '에도 시대'에 들어 수도가 된 에도, 즉 도쿄에 사람이 모여들고 노점상들이 우후죽순 늘어났으며 여기에서 판매하던 것이 초밥이었습니다.

 

원래 '에도'에서 팔던 초밥 역시 간사이 지방의 '누름초밥'형태였지만 이후 틀에 넣는 등의 번거로운 작업 없이 바로 손으로 쥐어주는 초밥이 탄생하였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초밥의 탄생입니다. 노점에서 술꾼들이 좋아하는 생선을 골라 간단한 식사로 먹던 값싼 음식이 '초밥'였지만 일부 스시 전문점들이 고급화를 추진하며 '에도'의 초밥은 점차 비싼 음식으로 변하게 됩니다. 심지어 뇌물로까지 쓰이기도 했는데 어떤 '스시 도시락'은 현재기준 100만 원 넘는 가격이었다고 하며, 이런 호화로운 스시가 막부 요인들에게 팔리기 시작하자 다른 가게들도 가격을 높이기 시작합니다.

 

위생상의 문제로 노점판매가 금지되기까지 하여 원래 일본 서민들이 길거리에 서서 먹던 값싼 스시는 어느새 서민들에겐 부담스러운 값비싼 음식이 되어 버린다. 이런 값비싼 음식 '스시'을 서민들에게 다시 돌려준 것이 바로 회전 초밥이었습니다.

 

1958년 오사카에서 '시라이시 요시아키'란 인물이 처음으로 회전 초밥집을 열었는데 당시 일본 스시 업계는 일손 부족이 심각했고 또한 '시라이시 요시아키'는 '너무 비싸진 스시를 ''어떻게 하면'' 일반인들도 부담 없이 먹게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을 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때 떠오른 것이 언젠가 맥주 공장을 견학했을 때 모든 작업이 자동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처리되던 모습이었고 '컨베이어 레일 위에서 돌아가는 초밥'은 '일손 부족'과 '값비싼 스시'의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있 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그는 좁은 식당에도 설치할 수 있는 회전초밥 레인을 만들어냈고 이는 큰 인기를 끌어 일본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냥 초밥을 빙글빙글 돌게만 만든 언뜻 보면 간단한 아이디어 같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고뇌의 흔적들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회전 초밥 레인은 시계방향으로 돌아 앉은 사람 기준 오른쪽으로 초밥 접시가 등장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들고 있기에 왼손으로 접시를 잡기 편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사람은 오른쪽 눈으로 판단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간혹 가게의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왼쪽으로 회전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일본에서는 '지옥 회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회전 초밥이 돌아가는 레인의 표준 속도는 분당 4~5m라고 합니다 이 속도는 손님이 접시를 집는데 불편함이 없고 또한 접시를 관찰하기에 적당한 속도이며 이보다 속도가 느리면 원하는 접시가 저 멀리 보이긴 하는데 내 앞에 오지 않는 그런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그럼 손님은 차를 마시며 물배를 채우게 되고 초밥 판매량은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회전초밥 접시에는 초밥이 2개씩 올라가 있는데 왜 이를 하나의 큰 피스로 만들지 않고 굳이 아기자기하게 두 조각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요?? 초밥이 지금의 딱 한입거리 사이즈가 된 것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영향이 큽니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초밥은 지금의 3배 정도의 크기였으며, 초밥 4개가 1인분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터지고 일본 국민들의 생활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는데 쌀 배급제를 비롯하여 식료품에 대한 통제 그리고 이런 식료품들의 암거래에 대한 감시가 심했습니다.

 

패전 후 일본의 식량난은 더욱 심해졌으며 이에 일본 총리는 허가받은 곳 외 모든 음식점의 영업을 금지하는 긴급조치령을 발표하게 됩니다. 식량을 절약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스시 음식점 주인들은 난리가 났고 이때 도쿄 스시 조합에서 내놓은 아이디어가 위탁 가공 이란 것이었습니다. 

손님이 쌀을 가져오면 밥을 지어 그 위에 생선을 얹어 주었고 대신 수수료를 받는다는 것이었는데 초밥을 만드는 요식업이 아니라 손님의 부탁으로 쌀을 이래저래 가공해서 다시 돌려주는 위탁 가공업이라 주장했던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이주장은 먹혔으며 도쿄의 스시 전문점들은 쌀을 스시로 '가공'해주는 곳이라는 강력한 어필이 들어있습니다. 스시 가공업을 허가하는 대신 제한 조건이 있었는데 '1인당 쌀 한 홉으로' '초밥' 10개까지만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쌀 한 홉은 150g에 해당되고 이를 10개의 초밥으로 만들면 지금과 비슷한 크기의 초밥이 만들어졌다. 이 작은 사이즈의 초밥 10개가 지금의 1인분 기준이 되었고 오직 '에도식 초밥' 만이 허가를 받을 수 있었기에 손으로 쥐어주는 형태의 초밥이 일본 전역에 보급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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